남자레플리카사이트 대미 협상, 연 200억달러 투자 한도 긍정적···장기 영향은 지켜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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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29일 한·미 관세협상 브리핑에서 “연간 200억달러의 한도 내에서 사업 진척 정도에 따라 투자하기 때문에 우리 외환시장이 감내할 수 있는 범위에 있으며 시장에 미치는 영향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 실장은 200억달러 조달 방식에 대해 “배당, 이자 등 우리 외화자산의 운용수익을 활용하되, 시장에서 일부를 조달한다면 정부보증채 형식으로 할 것”이라며 “정부보증채도 국내 외환시장이 아닌 국제시장에서 조달하겠다”고 했다. 그는 “외환시장 불안이 우려되면 납입 시기와 금액의 조정을 요청할 별도 근거도 마련했다”고 말했다.
일단, 연간 투자 한도를 200억달러로 제한했다는 점은 미·일 합의보다 진전된 내용으로 평가된다. 김정식 연세대 명예교수는 “우리 경제 규모나 대미흑자 규모, 경상수지 흑자 규모로 감내할 수 있을 것”이라며 “국내 경제에 대한 불확실성이 사라지면서 투자나 소비가 늘어나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득이 더 크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날 협상 타결 소식에 원·달러 환율은 서울 외환시장에서 야간거래 장중 한때 17원 가량 급락, 6거래일만에 1420원 아래서 거래되기도 했다. 환율은 협상 장기화 우려에 지난 23일 1441.5원까지 올랐다. 한 금투업계 관계자는 “상한이 생겨서 우리 외환시장에 문제가 생기면 돈이 나가지 않게 제도적으로 장치를 마련한 것은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한국 경제에 미칠 장기적 영향에 관해서는 판단을 유보했다. 특히 향후 투자심의 과정을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양희 대구대 교수는 “투자 규모, 분납 기간, 투자 방식 면에서는 우려는 덜었다”면서도 “외채를 발행하더라도 그 금액이 크지 않다고 했는데, 정부보증채가 국제시장에서 잘 팔릴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박종희 서울대 교수는 “연간 200억달러를 어떤 식으로 투자할지는 미국과 상세한 협상을 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식 명예교수도 “한국이 투자 심의 과정에서 얼마나 참여할 수 있을지가 과제”라고 평가했다.
나원준 경북대 교수는 “정부는 국내에서 외채를 동원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국책은행 등에 보증을 서는 형태로 외화를 조달하면 결국 외채가 되고, 외채는 국민이 갚아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국이 상호관세율을 25%에서 15%로 내리는 것 외에도 방위비 등 다른 분야에서 미국의 양보를 얻어냈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우리는 협상에서 통상을 지렛대로 방위비나 원자력협정 등을 얻어냈어야 하는데 관세율을 낮추는 데 그쳤다”며 “정부가 현금 투자를 여러 해로 나눠서 경제에 미치는 압력을 분산했다고 홍보하기에는 부족하다”라고 평가했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8일 “3분기 국내총생산(GDP)는 새 정부의 온전한 경제 성적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구 부총리는 이날 서울 상담동에서 열린 ‘공공기관 인공지능(AI) 대전환 워크숍’을 마치고 기자와 만나 “소비와 투자가 살아나고 정부가 두 차례의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역할을 한 부분도 겹치면서 나온 결과”라며 이같이 말했다.
이날 한국은행은 3분기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1.2%(전기비·속보치)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해 1분기 이후로 6분기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구 부총리는 “이같은 추세를 이어가기 위해 내수 활성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중장기적으로는 한국 경제의 잠재성장률과 총요소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며 “이를 위해 AI 대전환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댐 관리와 민원 처리, 안전관리 등 공공기관에도 AI를 접목한다면 생산성이 향상되고 대국민 서비스가 개선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대한민국 선순환 구조를 위해 가장 좋은 수단은 AI”라며 “공공기관이 AI 대전환을 한다면 생산성이 더 높아지고 GDP를 끌어 올리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구 부총리는 올해 1% 성장률 달성과 관련해서는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정부는 지난 8월 올해 한국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0.9%로 제시했다. 한은은 올해 4분기 성장률이 -0.1%를 밑돌지 않으면 1% 성장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고충운, 발해인. 선조는 해동 구려국의 왕족…증조 할아버지는 당나라(皇)의 국내성왕(國內城王), 할아버지는 국내성 좌상(左相)….’
얼마전 신라사학회 주최 발표회에서 알쏭달쏭한 내용의 따끈따끈한 논문이 새롭게 소개되었다. 루정호(樓正豪·러우정하오) 절강(浙江·저장)해양대 교수의 ‘고구려 유민 고충운 묘지명 고찰’ 논문이었다. 멸망 후 당나라로 끌려온 고구려 유민 4세대인 고충운(?~774)의 행적을 기록한 돌판(묘지·墓誌) 관련 연구다. 고충운 묘지명은 ‘평원 발해인 출신인 고충운의 선조는 해동 구려국(고구려)의 왕족이며 고구려 멸망 때 포로로 잡혀왔고, 이후 고씨를 성씨로 정했다’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발해 고씨와 고구려인
‘우선 고충운의 본관을 ‘발해인’이라 했다. 이 대목에서 오해는 금물이다. ‘발해’는 698년 대조영이 세운 해동성국 ‘발해’가 아니다. 중국의 사족 가문인 ‘발해 고씨’를 일컫는다. ‘발해 고씨’ 가문의 거주지는 ‘하북(河北) 수현(蓨縣·현 景縣)’이었다.
고충운 만이 ‘발해 고씨’를 칭한 것은 아니다. 다른 고구려 유민인 고연복·고목로·고덕·고흠덕·고진·고씨 부인 등의 ‘묘지명’에도 ‘발해인’ 또는 ‘발해수인(渤海蓨人·수현 출신)’이라 했다.
고구려 ‘고씨’의 경우 당나라에 와서 한자가 같은 ‘발해(하북 수현) 고씨’를 가문의 본관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충운 묘지명’은 “당나라가 고구려 왕(보장왕)을 포로로 삼아 중원으로 이주시켰고, 이후 자손들은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고 기록했다.
사실 유민 1세대의 경우 ‘발해 고씨’처럼 중국 성을 빌린 경우는 없었다.
왜냐면 고구려 지배층의 경우 그 지위가 당나라에서도 먹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세대 유민의 경우 그 출신지를 ‘국내성’(고제석·649~674), ‘요동 삼한(고현·642~690)’, ‘요동 평양’(고족유·626~695), ‘조선’(고자·665~697), ‘요동 책주’(길림성 흔춘 출신·이타인·609~677) 등으로 표기했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 후 60여 년이 지난 730년 무렵부터 양상이 달라진다. 이때부터 조성되는 묘지에는 고구려 색채가 옅어진다,
즉 고목로(650~730)·고덕(676~742)·고원망(697~740)·고진(710~773) 등 중국 성(발해 고씨)을 빌리거나 ‘경조 만년’(장안 출신·천비·707~729), 태원(산시성 출신·왕경요·680~734)처럼 중국을 출신지로 삼는다. 그러나 고구려 출신이라는 점을 굳이 숨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국내성 왕의 정체
이번에 소개된 ‘고충운 묘지명’가 그렇다. ‘발해 고씨’라 해놓고도 ‘고구려(해동 구려) 출신’ 임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게다가 증조 할아버지(고달)와 할아버지(고몽)가 ‘국내성 왕(國內城王)’, ‘국내성 좌상(國內城 左相)’을 지냈음을 자랑스레 알렸다.
이를 두고 루정호 교수는 “국내성 왕과 국내성 좌상은 허위의 칭호일 뿐 실제로 왕이나 좌상으로 봉해진 것은 아닐 것”으로 추정했다. ‘국내성 왕’은 국내성 고구려 유민을 관리하는 ‘자사(혹은 현령)’이고, ‘국내성 좌상’은 자사(혹은 현령)을 보좌하는 지위였을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자료 분석인만큼 섣불리 단정할 수 없다. 묘지명은 당대의 기록이 아닌가. 역사서의 기록은 없지만 당대에 ‘국내성 왕’이나 ‘국내성 좌상’ 같은 칭호가 부여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안정준 서울시립대 교수)
또한 ‘고충운 묘지명’엔 “당시 계속된 전쟁으로 나라에 위기가 닥치자 붓을 버리고 입대하여 무공을 떨쳤다”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고충운이 죽은 ‘태원부 복창리 관사’(현 산서성 태원시 복창항·山西省 太原市 福昌巷)는 ‘안사의 난’(755~763)-‘복고회은의 난’(764~765) 때 주요 전쟁터였다. 루정호 교수는 “잇단 반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고충운이 군사요충지인 태원부에 장기 주둔하다가 9년 뒤(764)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
■배신자 가문의 무덤
‘고충운 묘지명’ 소개를 계기로 당나라 권역에서 확인된 고구려 유민의 묘지명을 헤아려 봤다. 30여 건에 이른다. 필자는 그중 주요한 두 가문을 소환해본다.
700년 고구려 역사를 나락으로 빠뜨린 두 원흉, 즉 ‘연남생과 보장왕’의 가문이다.
우선 ‘연남생 가문’을 보자. 연남생 가문의 성씨는 당나라 고조 이연(李淵·618~626)과 이름자가 같다 해서 ‘천(泉)씨’로 창씨개명 했다.
헤아려보니 만 10년이 흘렀다. 2015년 10월 필자는 강남문화원 답사단의 일원으로 중국 낙양(뤄양·洛陽)의 북망산 인근, 한적한 농촌마을을 찾았다. 이 마을은 1922년 ‘천남생 일가의 묘지명’이 출토된 낙양시 맹진현(孟津縣·멍진현) 송장진(送庄鎭·쏭좡진) 동산두촌(둥산터우촌·東山頭村)이었다.
마을 주변을 샅샅이 살피던 답사단은 잡풀과 나무가 듬성듬성 자란 봉분 3기 모양의 지형을 보았다.
천남생(634~679)-헌성(650~692·아들)-비(708~729·증손자)의 무덤이 확실했다.
■골육상쟁-배반
천남생 일가의 묘지명을 보자. 우선 남생의 것….
“공(남생)은 고구려를 떠나 태평한 나라(당)로 귀순했다. 668년 고구려 정벌을 책임지고 바람처럼 달리며 번개처럼 내쳐서 평양성에 다달아~높은 성벽의 성가퀴를 깨뜨렸다. 그 공적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다. 그가 갑자기 죽으니 황제의 슬픔이 진실로 깊었다.”(‘천남생 묘지문’)
고구려의 대막지리 연개소문(590~665)은 슬하에 남생(634~679)-남건(생몰년 미상)-남산(639~701) 등 삼형제를 두었다. 연개소문은 삼형제의 반목을 예견한듯 “너희 형제는 물과 고기처럼 화목해야 한다. 절대 다투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665년(보장왕 24) 연개소문이 죽자 장남인 남생이 대막지리 자리를 물려받아 국정을 총괄했다.
하지만 남생이 국정을 두 동생인 남건과 남산에게 맡기고 지방순찰에 나선 것이 파국을 불렀다. 형제 간 반목을 부추기던 불온 세력의 올가미에 걸렸다. 남생-남건·남산 사이에 골육상쟁이 벌어졌다. 두 동생은 남생의 맏아들 헌충을 죽였다. 이에 국내성으로 피한 남생은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된다. 둘째 아들 헌성을 비롯해 3번이나 당나라에 항복사절을 보내 원군을 청한 것이다.
결국 666년 남생이 이끌던 국내성 등 6개성 10여 만 호가 투항하고 말았다.(‘천남생 묘지명’)
■당나라군의 앞잡이
이제 ‘연남생’은 ‘천남생’이 되어 고구려 정벌의 앞잡이가 됐다. 당나라로서는 천군만마였다.
당나라의 가언충은 황제(고종)에게 “예전에 고구려엔 틈이 없었지만 이젠 남생 덕분에 내부사정을 다 알 수 있으니 반드시 이길 것”(<삼국사기> ‘보장왕’조)이라고 자신했다. 그것이 현실이 됐다.
“668년 9월 남생은 승려 신성 등과 내통했으니…보장왕과 남건은 포로가 됐으며….”(‘천남생 묘지문’)
마지막 순간까지 평양성을 지키던 둘째(남건)는 스스로 목을 찔렀지만 미수에 그쳤다. 결국 장안으로 압송된 남건은 원지로 유배되었다.
남생의 씻을 수 없는 죄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앞장서서 막았다는 것이다. 고구려 유민들은 가열찬 독립운동을 펼쳤다.
멸망 직후인 669년 ‘고려의 배반자들이 많아 황명으로 3만8200호(2만8800명)를 여러 주로 이주시켰다’(<자치통감>)는 기사가 보일 정도다.
당나라는 남생을 고구려인의 집단 이주 지역인 요동 지역에 파견하여 고구려 부흥운동을 막아섰다.
679년 연남생이 46살로 죽자 당나라 조정은 극진한 예우를 갖췄다. ‘천남생 묘지명’을 보면 ‘국장(國葬)’이 연상될 정도다.
“남생이 죽자 황제는 안타까워했고…예를 갖춰서 책봉을 이행…견포(명주실로 짠 비단과 무명) 700단과 속미(쌀과 벼) 700석을 하사…장례 및 매장 비용을 관이 지급…3일 동안 정사를 보지 않았고…5품 이상의 관리들로 하여금 조문하도록….”
묘지명은 이어 ‘고구려를 황제의 땅으로 만들고, 검을 들고 황제를 지켰다’는 등 남생의 8가지 공로를 길게 열거했다. ‘묘지명’은 특히 남생의 죽음을 ‘제후의 죽음’을 뜻하는 ‘훙(薨)’이라 했다.
■대를 이어 충성
남생의 아들인 헌성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천헌성 묘지명’에 따르면 천헌성은 두 아우(남건·남산)에게 쫓겨 국내성에 웅거하고 있던 아버지(남생)의 명을 받아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666)
“16세였던 헌성은…아버지 남생에게 ‘이제 중국에 입조하여…중국 군대와 힘을 합해 (고구려를) 토벌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권했다. 이에 남생은 ‘옳다’고 여겨…대형 불덕-염유에 이어 헌성까지 파견…당나라군을 이끌고 와서 고구려를 쓸어버렸으니….”
‘천헌성 묘지명’은 이어 “(당군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남생이 집안을 지키고 나라를 보전한 것은 실로 공(헌성)의 공이었다”고 평했다. 33살의 아버지(남생)과 16살 아들(천성)이 705년 역사에 빛나는 고구려를 팔아먹었다는 것이다.
천헌성은 당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친다. 686~688년 헌성은 돌궐 정벌의 선봉에 섰고, 모반사건을 진압한 공로로 비단 100단과 황제가 타던 말 1필을 하사 받았다. 그러나 그의 명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혹리의 대명사인 내준신(651~697)의 덫에 걸린 것이다.
“691년 당대 형벌과 옥사를 농단했던 내준신이 천헌성에게 뇌물을 요구했다. 그러나 헌성이 거부했다. 그러자 앙심을 품었던 내준신은 다른 올가미를 씌워 천헌성을 죽였다.”(‘천헌성 묘지명’)
그러나 헌성의 죄가 무고로 밝혀짐에 따라 황제(무측천·재위 690~705)의 사면을 받았다.(700) 헌성에게는 정3품의 관직이 추증됐다.
천헌성의 아들인 천은은 ‘정2품’의 작훈을 받았다. 또 천헌성의 손자이자 천남생의 증손자인 천비는 겨우 2살 때 정5품 관직(식읍 400호)의 주인공이 됐다.
당나라에서 테어날 때부터 금수저였던 천비는 22살에 요절했다. ‘천비’의 묘지명은 아버지(천은)가 썼다. 천은(3대)이 아들(천비)의 무덤을 할아버지(천남생)과 아버지(천헌성) 곁에 조성했다.
천은은 아들(천비)의 묘비명을 쓰면서 아들의 출신을 ‘경조 만년’(당나라 도읍 장안)이라고 표현했다. 멸망 후 3대가 지났으니 고구려 정체성도 흐려졌을 것이다. 그런만큼 아들의 출신지에 굳이 ‘고구려’를 부각시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허망한 향수병
이 대목에서 놓친 인물이 한 명 있다. 남생의 막내동생은 남산이다.
남산의 무덤은 남생 일가의 묘에서 4㎞ 떨어진 곳에 있다. <삼국사기>는 “668년 9월21일 (막바지에 몰린) 보장왕이 항복 사절로 보낸 인물이 천남산”이라 했다. <구당서>는 “남보다 먼저 항복한 남산에게 관직(사제소경·종4품 상)을 제수했다”(‘동이열전·고구려’조)고 했다.
그렇게 투항한 남산은 남생-헌성-은-비의 직계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나름 호의호식했다.
1923년 4월 낙양 맹진현 평락진(平樂鎭·핑러진) 유파촌(劉坡村·리우포촌)에서 확인된 ‘천남산 묘지명’에 나와있다.
묘지명은 “남산은 투항 이후 금허리띠를 차고 황실의 번역관 일을 하면서 저녁엔 음악에 심취한채 지냈다”고 했다. 남산의 묘지명 곳곳에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담겨있다.
“…고국으로 가는 길은 먼데, 상여 실은 수레는 언제쯤 돌아갈까…금으로 된 허리띠에 패옥으로 꾸몄으나, 북소리와 종소리는 근심과 어지러움이요, 그리운 마음은 길게 뻗친 숲이로다….”
고향을 그리워했던 것 같다. 그러나 갈 수 없는 고국…. 허망한 향수병이었다.
■조선군왕 집안
그렇다면 보장왕 일가는 어떨까. ‘고진’과 ‘고씨 부인’의 묘지명이 눈길을 끈다.
‘고진 묘지명’의 주인공인 고진(701~773)은 중국 성씨인 발해 고씨를 자칭했다. 그러나 묘지명은 “할아버지인 장(震)은 조선군왕이고, 아버지 연(連)은 안동도호”라 했다.
할아버지 ‘장’은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642~668)을 가리킨다. 묘지명은 “고진은 부여의 높고 존귀한 가문이며 진한의 명망있는 집안인데, 귀순하여 대대로 왕을 칭했다”고 했다.
또 1999년 소개된 ‘고씨 부인 묘지명’은 “고씨 부인(731~772)의 증조 할아버지는 조선왕(보장왕), 할아버지는 ‘고연’이며, 아버지가 ‘고진’”이라 했다. ‘묘지명’은 “고진의 4녀가 고씨 부인”이라 했다.
여기서 보장왕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돌아본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보장왕은 그 아들 복남·덕남 및 대신 등 20만명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갔다.(<삼국사기> ‘문무왕’조) <구당서> 등은 “669년 5월 고구려인 2만8200가구를 당나라로 끌고 가 전국 각지로 강제 이주시켰다”고 했다.
■보장왕의 굴욕
그 해 12월 당나라 수도 장안의 함원전에서 열린 ‘고구려 정벌 보고식’에서 보장왕은 다시 한번 굴욕감을 느낀다.
즉 보장왕은 당 고종으로부터 사평태상백(정3품)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천남생의 변국공(묘지명에서는 현도군개국공·정2품)보다 낮은 작훈이었다. 작훈은 공적의 경중에 따라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 등 5등급으로 나뉜다.
그후 들불처럼 일어난 고구려 부흥운동이 신라의 대당 투쟁과 연결되면서 당나라는 큰 곤경에 처하게 된다. 결국 나·당 전쟁에서 패한 당나라는 장안에 머물고 있던 보장왕을 요동도독으로 삼고 조선군왕으로 책봉했다.(677년 2월)
그런 뒤 당나라 각지로 강제 이주되었던 고구려 유민을 함께 돌려보았다. 하지만 당나라를 보장왕을 신뢰하지 않았다. ‘천남생 묘지명’은 “남생이 677년 황명을 받들어 요동에 파견되어 그곳 주민들을 위무했다”고 했다.
한마디로 당나라가 보장왕을 조선군왕으로 파견하면서, 그 보장왕을 감시할 당나라 관리로 ‘천남생’을 선택했다는 얘기다.
■보장왕의 궐기
보장왕은 발톱을 숨기고 있었다. 그래도 700년 고구려 제국의 군주가 아닌가. 2년 뒤인 679년 1월29일 천남생이 46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보장왕은 “이때다” 싶어 봉기에 나선 것 같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거사는 사전에 발각된다.
“보장왕이 요동에서 반란을 꾀하고 몰래 말갈과 통했다.”(<삼국사기>)
“보장왕이 말갈과 반란을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었다. 보장왕은 촉 땅(지금의 사천성 공주)으로 유배되었다.”(<구당서> <신당서>)
고구려 유민은 반란의 무리로 찍혀 다시 하남과 농우(감숙성·甘肅省)로 강제 이주됐다.
머나먼 촉땅으로 유비된 보장왕은 거사 실패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보장왕은 682년 서거했다. 당나라는 보장왕에게 위위경의 관작을 추증했다. 당 황제는 보장왕의 시신을 장안으로 운구하도록 했다. 보장왕의 시신은 동돌궐의 마지막 왕인 힐리가한(재위 620~634)의 곁에 묻혔다.
당나라는 보장왕의 손자인 고보원을 조선군왕으로 봉하고(686), 아들인 고덕무를 안동도독으로 삼았다.(699)
또 보장왕의 또다른 아들인 고련도 안동도호의 관작을 받았고, 그 관작은 손자인 고진에게 세습되었다.
당나라가 한때의 고구려 군주를 대를 이어 예우해준 것일까. 달리 보면 고구려 유민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대가 흘러갈수록 고구려 유민은 신라와 돌궐, 말갈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구당서> 등은 “갈수록 고구려인의 호구가 줄어들면서 결국 고구려의 군장(君長)이 끊겼다”고 했다. ·
■결국은 반역자
보장왕 가문과 연(천)남생 일가의 삶을 살펴보니 어떠한가. 이중 보장왕은 연씨 가문의 서슬에 재위 재내 허울 뿐인 군주였다. 결국 망국의 책임까지 짊어졌다. 하지만 보장왕의 끝은 그래도 봐줄만 했다.
신라의 경순왕, 고려의 공양왕, 조선의 순종 등과 비교해보자. 그래도 보장왕은 왕조를 되살리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을 친 군주가 아닌가. 연남생 일가는 그렇지 않았다.
세계 제국 당나라와 맞짱을 뜬 아버지(연개소문)의 뜻을 저버리고 나라를 들어 당나라에 바쳤다.
그 뿐이 아니다. 고구려 부흥운동을 저지하고 당 황제를 위해 대를 이어 충성했다.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1075~1151)은 이렇게 평가했다.
“남생·헌성이 비록 당나라 황실에 알려진 신하가 되기는 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역자가 됨을 면할 수는 없다.”(<삼국사기> ‘열전·연개소문’)
그나마 자결까지 시도하면서 끝끝내 항복을 거부했던 연남건 만이 배신자 가문의 한가닥 남은 양심이 아니었을까.(이 기사를 위해 안정준 서울시립대 교수, 권덕영 부산외국어대 교수, 김병희 경기대 초빙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참고자료>
루정호, ‘고구려 유민 고충운(高冲雲) 묘지명에 대한 고찰’, 신라사학회 학술월례회 발표논문, 2025
권덕영, <재당 한인 묘지명 견구-자료편>,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21
여호규·배근흥, ‘유민 묘지명을 통해본 당의 동방정책과 고구려 유민의 동향’, <동양학> 69권,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2017.10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멸망과 부흥운동, 유민사>사7), 동북아역사재단 한중연구소, 2024
안정준, ‘당대(唐代) 묘지명에 나타난 중국 기원 고구려 유민 일족의 현황과 그 가계 기술-고구려 유민의 개념과 범주에 대한 제언’, <역사와 현실> 101호, 한국역사연구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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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숙, ‘중국 소재 고구려 유민의 동향’, <한국고대사 연구> 23, 한국고대사학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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